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12월 어느 겨울날.
겨울 산자락에 위치한 어느 산장 안에는 불씨가 살아 있는 벽난로만이 실내 온도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두 연인이 포근한 이불로 몸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다. 두 사람 다 벽난로를 마주본 채였지만, 그들 중 붉은 머리의 남자는 두 팔로 푸른 머리의 남자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깊은 숨소리를 내며 숙면 중이었다.
조용한 산장에서 나는 소리라곤 타닥타닥 작은 불씨를 튀기는 벽난로의 불꽃소리와 아침 단잠에 빠진 두 사람의 숨소리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밖에서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알람 삼아 푸른 머리의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뜨며 감추고 있던 아메지스트를 드러냈다.
그는 전 4왕권자이자 셉터4의 수장인 무나카타 레이시였다. 막 잠에서 깬데다 안경이 없어 시야가 흐릿하긴 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니 타닥타닥 작은 불꽃을 튀기고 있는 벽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집에 벽난로가 있었나 의문이 들던 것도 잠시, 그제야 여기가 지난밤에 도착한 산장이라는 걸 상기했다.
그리고 저를 쿠션마냥 두 팔을 제 허리에 감고 끌어안은 채 자고 있는 이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무나카타는 낮게 쿡쿡 웃은 뒤 몸을 돌려 예의 붉은 머리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와 굳게 닫힌 두 눈은 상대가 여전히 깊은 잠에 들었음을 알렸고, 무나카타는 오른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조심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었다.
엄지로는 눈가 언저리를 쓸다가, 검지로는 곧게 선 콧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던 그는 입술에서 잠시 멈췄다 이내 턱선을 따라 그리며 잠든 이를 간지럽혔다.
그걸 느꼈는지 상대도 잠시 미간을 좁히고는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무나카타는 그 반응에 재밌다는 듯 조용히 웃더니 고개를 기울여 그의 입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남자, 스오우 미코토는 좁혔던 미간을 풀고 다시 편한 숨을 깊이 내쉬며 잠들었다. 그러면서 무나카타의 허리에 두른 두 팔에 힘을 싣더니 그를 제 품으로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맞닿은 몸 사이론 스오우 특유의 온기와 규칙적으로 쿵쿵 뛰는 심장고동이 전해졌고, 무나카타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던 스오우였기에, 무나카타는 이따금 그가 이렇게 살아서 제 옆에 함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꿈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때마다 스오우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그였다.
왕권자로서의 힘은 사라졌어도 스오우의 몸은 여전히 저를 따뜻하게 감쌀만큼 따뜻했다. 해서 그 온기에 눈이 다시 감기려 할 즈음, 스오우의 목덜미와 어깨에 있는 붉은 흔적이 무나카타의 눈에 들어왔다.
그 흔적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무나카타의 머리 속에서 빠르게 재생되었다. 지난밤, 벽난로 앞에서 서로에게 격렬한 입맞춤을 선사하며 뜨거운 밤을 보낸 것이 떠오르자, 하얗던 무나카타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사흘 간의 연휴로 시즈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시골의 겨울 산장에 오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
일곱 왕을 선택하고 각 왕권자에게 그에 걸맞은 힘을 부여한 드레스덴 석판이 파괴된 후,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미묘했던 그들의 관계를 기정사실화, 즉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으로 발전시켰다.
처음엔 서로가 이제 곁에 있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걸 하나씩 하나씩 하다보니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석 달을 넘어 어느 새 한 해가 끝나는 달로 접어들었고, 그에 비례하듯 서로를 향한 애정도 깊어져 갔다.
그러다 12월 초엽의 어느 날
그 날은 모처럼 무나카타가 일찍 일을 끝마치고 온 터라 스오우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둘은 소파에 앉아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무나카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심드렁한 눈으로 영화를 시청하던 스오우는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벽난로 앞에서 누운 채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오자, 그 모습을 제법 유심히 지켜봤다. 어찌나 열심히 봤으면 무나카타가 먹으라고 직접 까준 귤을 입가에 갖다줬는데도 먹지 않았다.
해서 그가 저를 부르고 나서야 스오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화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더군요."
"...재미는 무슨."
웃음기 머금은 연인의 말에 스오우는 미간을 좁히더니 대충 얼버무린 후, 무나카타가 까준 귤을 받아 먹으면서 마저 영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침, 침대 헤드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스오우는 무나카타한테 대뜸 한 가지를 통보했다.
"연휴 사흘 일정, 모두 빼."
"...뭐라고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무나카타는 단말을 켜서 달력을 확인했다. 금요일이 크리스마스였기에 주말까지 포함해 사흘간의 연휴가 생겨, 호무라와 셉터4는 연휴 첫날에 합동 송년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랬기에 그 날은 송년회가 있다며 무나카타가 안 된다고 했지만 스오우는 진심이었는지 단호했다.
"빼. 연휴때만큼은 널 독점하고 싶으니까."
"ㅁ, 무슨...! 아침부터 잘도 그런 말을...!"
스오우의 솔직한 답변을 들은 무나카타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그의 얼굴을 향해 베개를 던진 후 서둘러 방 밖을 빠져나가 출근했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모르거나 없다면서 스오우를 곱씹은 것도 잠시, 내심 저도 스오우와 단 둘이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휴가 비슷한 걸 즐기고 싶었던 터라 무나카타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해서 은근히 연휴를 기다린 무나카타를 데리고 스오우가 온 곳이 바로 하얀 눈이 덮인 겨울 산장이었다. 산장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니라 실내 온천 및 노천 온천은 물론 스키와 썰매 등을 즐길 수가 있는 곳이었다. 무나카타는 스오우가 이런 장소를 어떻게 알았나 싶어 의아해하지만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아 캐묻는 대신 만족감을 표했다.
산장 주변 여기 저기를 구경하고 산책한 후 근사한 저녁을 즐긴 둘은 벽난로 근처 테이블에 앉아 와인과 위스키를 마셨고,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무르익어 자연스레 입술을 겹쳤다. 서로가 마신 알코올의 향과 맛, 그리고 담배냄새가 섞인 특유의 머스크와 쿨워터를 간직한 고유의 체향에 취해 서로를 깊이 탐했고, 종래에는 타닥타닥 불꽃을 튀기며 실내를 따뜻하게 데운 벽난로 앞에 누워 서로를 품고 안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스오우에게 남긴 붉은 흔적이 있듯 필시 저에게도 스오우가 남긴 흔적이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거기다 맞닿은 몸 아래 허벅지 안쪽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에 무나카타는 다시 한 번 흠칫 몸을 떨었다. 지난밤 느꼈던 희락의 기운이 다시금 올라오려는 느낌에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돌렸지만, 스오우가 그를 순순히 보내줄리 만무했다.
무나카타의 허리에 감았던 두 팔에 힘을 더 실어 제 쪽으로 끌어당긴 후 붉은 꽃이 피어난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어딜 가냐며 스오우는 낮게 속삭였다. 그런 뒤 아예 못 가게할 심산으로 이번에는 지난밤 무나카타의 목덜미와 어깨 아래에 남긴 순흔을 다시 한 번 훑으며 그를 더듬기 시작했다.
크고 거친, 하지만 따뜻함을 머금은 두 손이 허리께와 골반, 그리고 그 아래를 어루만지자, 무나카타는 그 손길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나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순순히 스오우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아침부터 그와 느릿하고도 깊은 사랑을 오래도록 나누었다.
***
매년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가족들끼리, 혹은 지인들끼리 모여 가는 해를 보내고 새로이 다가올 해를 기다리며 송년회를 연다. 호무라와 셉터4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는데, 올해 양 클랜의 송년회는 예년과는 많이 달랐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마냥 그 동안 으르렁 거리며 앙숙으로 지내던 호무라와 셉터4는 밥상동맹으로 정글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하면서 어색하고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석판이 파괴되고 난 후에는 서로간의 교류가 생기는 등 예전의 날을 세우던 관계를 차츰 누그러뜨려나갔다. 해서 석판이 파괴되고난 후 수 개월이 흘러 한 해가 다 끝나갈 무렵이 되니, 이제는 제법 친해져 스스럼없이 바 호무라를 찾아와 호무라 클랜즈맨들과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해서 이들의 올해 송년회는 바 호무라에서 함께 보내게 되었다. 송연회 당일이 금요일이었던 터라 주말까지 포함 사흘의 연휴가 생겨 연휴 첫날엔 다 같이 모여 송년회를 보내고 다음날 마음맞는 이들끼리 모여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한 그들이었다.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거리를 밝힐 무렵, 바는 셉터4 대원들과 호무라 클랜즈맨들로 북적였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눈 후, 정성스럽게 준비된 송년회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작년까지만해도 이런 그림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하하! 그자? 내도 우리가 이리 될끼라곤 상상못했데이, 세리쨩."
"...뭐, 서로 싸우는 것보단 이게 훨씬 좋네."
쿠사나기의 말에 긍정하며 셉터4의 부장, 아와시마 세리는 쿠사나기가 준비한 특제 단팥 칵테일을 음미했다. 그녀의 입가엔 맛 좋은 칵테일의 향과 눈 앞에서 자신의 부하들과 한때 적대시여겼던 클랜즈맨들이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스러운 미소가 길게 그려져 있었다.
"쿠사나기 씨! 여기 와인 한 병 더 추가요!"
"야야, 느그들 초저녁부터 이리 달리면 내일 아침 힘들데이. 특히, 토츠카, 니는 내일 여행 총대니까 아들 단디 챙기고."
"넵! 알겠습니다!"
"...어째 불안한데..."
미심쩍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쿠사나기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눈으로 와인병 하나를 토츠카에게 건넸다. 새로운 음주거리가 들어오자 토츠카가 있던 테이블은 이내 환호로 뒤덮였고 쿠사나기는 그런 그들을 보고서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 모습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실장님이 안 계셔서 그런가..."
"음? 뭐라 말했나, 세리쨩?"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와시마는 쿠사나기의 물음에 잠시 놀란 듯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장님이 안 계셔서 그런가 대원들 모두 작년 송년회 때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헤에, 그렇나? 우리는 미코토가 있든 없든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마는 어째 저 짜슥들도 오늘 더 신나 보이네."
"...어디에 있는지 알아?"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아와시마의 질문을 곧바로 간파한 그는 어느 새 새로 리필한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후 답했다.
"그 두 사람, 지금이면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데 있을기다."
"도심에서 한참 벗어났다면...어디 산이라도 갔어?"
"얼추 비슷하데이. 뭐, 미코토 녀석도 보아하니 연휴 때는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있고 싶었나 보더라."
아와시마도 고개를 끄덕인 후 피식 웃으며 "우리 실장님도." 덧붙였다.
사실 스오우와 무나카타가 제법 진지한 사이라는 걸 아는 이는 호무라와 셉터4 다 통틀어도 몇 되지 않았다.
호무라에는 쿠사나기와 안나, 토츠카가 그러했고, 셉터4에는 아와시마와 후시미만이 그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해서 무나카타가 이번 송년회에 불참한다고 했을 때 아와시마와 후시미는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반면, 쿠사나기는 조금 뒤늦게 무나카타가 송년회에 불참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거기에 스오우가 엮여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조 현상(?)이 있긴 있었다.
송년회가 열리기 1주일 전, 쿠사나기는 여느 때처럼 카운터에서 샴페인잔과 와인잔을 깨끗이 닦고 있었다. 그때,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스오우가 그를 불렀다.
"쿠사나기."
"와?"
"겨울 산장 같은 데 있냐?"
쿠사나기는 눈을 잠시 깜빡였다. 자가 뭐라카노. 겨울 산장?
"있기야 있지. 내가 아는 곳도 한두군데 정도 있다마는. 와 물어보는데?"
"거기가 어딘데?"
쿠사나기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순순히 자기가 알고 있는 산장 두 군데를 알려줬고, 스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 경청했다. 이 노마가 뜬금없이 이런 거는 왜 물어보나 싶었지만, 이내 별일이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며칠 뒤, 스오우는 쿠사나기에게 대뜸 연휴 사흘 동안 없을 테니 저를 찾지 마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날려 그를 벙 찌게 만들었다.
"아니, 어데를 가길래 사흘씩이나 없다기고? 언제 가는데?"
"연휴 첫 날. 그 외엔 묻지 마. 알려고도 하지마."
"허! 참말로..."
쿠사나기는 한숨을 쉬며 샴페인 잔을 마저 닦았다. 그러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잔을 닦다말고 재빨리 물었다.
"가만, 연휴 첫 날? 우리 송년회 할 때 간단 말이가?"
"아아."
"...야타쨩이나 다른 녀석들, 많이 섭섭해 할낀데."
"나 없이 노는 게 그 녀석들도 마음 편할 거다. 특히 셉터 녀석들은 더더욱."
"하? 뭔 말이고?"
그에 대한 답은 그 날 오후, 바 호무라로 놀러온 도묘지를 통해 듣게 되었다. 석판이 파괴되고 난 후, 셉터4 대원들은 종종 바 호무라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들 중 특히 도묘지는 틈만 나면 바를 찾아와서 놀다가곤 해 이제는 아예 객식구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이 날도 호무라에 오면 늘상 마시는 음료를 쿠사나기에게서 익숙하게 받던 도묘지는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말했다.
"아참, 송년회 때 실장님 불참 하신대요."
쿠사나기가 묻기도 전에, 도묘지와 제법 친해진 후지시마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희 실장, 그런 자리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며?"
"그렇긴 한데, 이번엔 무슨 일이신지 이번 송년회는 양측의 클랜즈맨들끼리 즐기라고 하셨어."
"이유는 모르고?"
"응."
도묘지와 후지시마의 대화를 듣던 쿠사나기는 그제야 스오우가 왜 송년회 불참 통보를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지도 크리스마스에는 지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있고 싶은가 보구만.'
대강 미루어 보건대 스오우는 제가 일전에 알려준 곳에서 후보를 추려 알맞은 산장을 선택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되었기에 예약 같은 건 어떻게 했으려나 의문이 들던 차, 클랜즈맨들 사이에서 두 전직 왕권자 얘기가 나오자 대놓고 틱틱 대는 후시미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시미를 시켜서 산장을 잡은 듯했다.
잘 도착이나 했으려나 하는 또다른 의문이 든 것도 잠시, 운전은 무나카타가 하고 갔겠거니 여기고는 이내 옆에 서 있던 아와시마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샴페인 글라스와 와인 글라스가 부드럽게 맞닿아 맑게 짤랑-하는 소리가 울렸다.
"응? 안나 왜 그래?"
한편, 호무라와 셉터4 클랜즈맨들과 두루두루 얘기를 나누던 토츠카는 별안간 안나가 제 옷깃을 잡아 당기는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새빨간 루비를 두 눈에 머금은 아이는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 눈 와."
"헉! 진짜!?"
"오! 진짜 눈 온다!"
다들 먹다가, 마시다 말고 창가로 우르르 몰려 눈 내리는 것을 구경하는 양에 쿠사나기와 아와시마는 소리내어 쿡쿡 웃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오늘이랑 딱 어울리네."
"그르네. 그 둘이 있는 곳도 지금쯤 눈이 오겠구마."
같은 시각, 쿠사나기의 예상대로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산장 테라스에 자리를 깔고 앉아 밤하늘을 구경하던 중, 별들이 촘촘히 수놓인 짙은 남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꽃을 보고 있었다.
무나카타의 뒤에 앉아 자신들을 덮을 정도로 큰 담요를 두른 스오우는 그를 감싸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얹으며 산장 주변의 설경을 감상했다. 스오우 특유의 체향과 담요가 선사하는 포근함에 젖은 무나카타는 살풋 웃으며 그의 너른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편안한 류의 것이었다. 굳이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가 잘 알았기에, 무나카타는 입가에 은은한 호선을 그리며 담요 속에 감춰졌던 제 손 하나를 들어 스오우의 손을 덮었고, 스오우는 그저 낮게 쿡쿡 웃으며 그를 끌어안은 두 팔에 무나카타가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실었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차가운 바깥 기온에 발그레해진 뺨을 간질이기 시작했을 때, 무나카타는 별안간 스오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하?"
"벽난로 말입니다. 혹시 여기를 찾아온 게 저번에 같이 본 영화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까?"
"......"
정곡에 찔린 듯 잠시 할 말을 잃은 스오우는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재미없다고 덧붙였다. 그에 무나카타는 쿡쿡 웃으며 답했다.
"신선하네요. 스오우 당신도 그런 생각을 다 하고, 그걸 또 실행에 옮기는 게."
"시끄러."
"오야, 들켜서 부끄러운 겁니까?"
"...그래도 좋지 않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저를 놀리는 무나카타에게 스오우는 물었다. 무나카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스오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겹쳤다. 아침에 나누었던 열정적인 키스와 달리, 그저 입술만 맞닿은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춘 그는 짧게 쿡쿡 웃은 후 입술을 떼며 물었다.
"이걸로 답이 되었을까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스오우는 무나카타와 이마를 맞대며 입가에 짙은 호선을 그렸다. 무나카타도 스오우와 의미가 다르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푸스스 웃은 후 그와 함께 다시 눈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장소였지만, 그들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송년회를 확실히 즐기고 있었다.
설경을 즐기고 있는 연인들 너머 산장 안의 거실에는 오직 벽난로만이 실내를 밝힌 채, 장작에서 작은 불꽃을 타닥타닥 튀기며 느긋한 여유를 보내고 돌아올 두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